MK ATLAS· 과학 아틀라스

개념 풀이

기초연구 — 쓸모를 묻지 않는 일은 왜 하나

이 시리즈는 이걸 배워서 어디다 쓰나 하는 질문에서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은 그 질문이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대전의 기초과학연구원은 당장 쓸 데를 묻지 않는 연구를 하는 곳입니다. 그런 일을 왜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정말 쓸모없는지.

이 글이 꿰는 질문들 25분 분량갱신 2026-09-09

쓸모없다던 것들의 목록

는 이천 년 넘게 순수한 호기심의 영역이었습니다. 실용성을 자랑삼아 부정하는 수학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 편에서 본 대로 지금 인터넷 가 통째로 그 위에 서 있습니다.

원자핵이 자석 안에서 어떻게 흔들리는지 알아보던 연구가 있었습니다. 물리학자들의 관심사였습니다. 그것이 병원의 MRI가 되었습니다. 15편에서 본 입니다.

빠르게 움직이면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이야기는 백 년 전에는 순전한 이론이었습니다. 지금 그 계산을 빼면 휴대전화의 위치 안내가 하루 만에 십 킬로미터쯤 어긋납니다.

그렇다고 아무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쓸모를 묻지 않는다고 해서 기준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초연구에도 까다로운 기준이 있습니다.

  1. 답할 수 있는 질문인가. 크고 멋있어도 확인할 방법이 없으면 과학이 아닙니다.
  2. 아직 아무도 하지 않았는가. 남이 한 것을 다시 하는 일은 확인일 뿐 발견이 아닙니다.
  3. 틀렸을 때 틀렸다고 드러나는가. 무슨 결과가 나와도 설명되는 이야기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쓸모를 미리 정하지 않을 뿐, 질문은 대단히 엄격하게 고릅니다. 이것이 입니다.

여기부터 조금 더

시간의 단위가 다르다

기초연구가 응용연구와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시간입니다.

삼 년짜리 과제로는 할 수 없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십 년을 파고들어야 겨우 입구가 보이는 것들 말입니다. 그런데 삼 년마다 성과를 내놓아야 하는 구조에서는 아무도 그런 질문을 고르지 않습니다. 확실히 나올 것만 고르게 됩니다.

그래서 기초과학연구원은 연구단을 만들어 오래 맡기는 방식을 씁니다. 사람을 뽑아 놓고 주제를 그 사람에게 맡깁니다. 과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주는 쪽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늦게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응용부터 했습니다. 이미 있는 것을 빨리 잘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때로서는 옳은 선택이었습니다. 없는 것을 알아내는 일보다 있는 것을 따라잡는 일이 급했으니까요.

그런데 따라잡고 나면 다음 문제가 생깁니다. 앞서가려면 남이 안 해본 것을 해야 하는데, 남이 안 해본 것은 대개 기초에서 나옵니다. 베낄 대상이 없어진 자리에서 필요한 것이 다릅니다.

기초과학연구원이 2011년에 세워진 배경이 이것입니다. 이름부터 기초입니다.

여기서 무엇을 하나

연구단이 서른 곳 남짓 있고 주제가 제각각입니다.

  1. 물질의 바닥을 파는 쪽 — 알갱이와 힘, 그리고 아직 정체를 모르는 것들입니다.
  2. 수학 — 당장 쓸 데를 묻지 않는 대표적인 분야입니다.
  3. 나노와 새 물질 — 16편에서 본 크기가 성질을 바꾼다는 이야기의 안쪽입니다.
  4. 생명과 유전체 — 세포 안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입니다.
  5. 기후와 지구 — 12편에서 본 땅과 대기를 더 깊이 들여다봅니다.

강원도 정선의 폐광 아래 천 미터 깊이에 지하 실험실도 있습니다. 왜 땅속으로 들어갈까요. 하늘에서 쏟아지는 이 워낙 시끄러워서,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일을 보려면 그 소리를 흙과 바위로 막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보려고 빛을 더 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조용하게 만드는 쪽입니다.

2편에서 본 중이온가속기도 이 연구원에서 시작해 지금은 따로 떨어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정말 아무것도 안 나오면

정직하게 말할 대목입니다. 기초연구의 대부분은 눈에 보이는 쓸모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돈이 아깝다는 논쟁이 늘 있고, 그 지적이 터무니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하는 이유가 둘 있습니다.

쓸모를 묻지 않는다는 말의 뜻

이 말을 쓸모를 무시한다는 뜻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쓸모를 미리 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씨앗을 심는 사람과 열매를 따는 사람이 다른 일이라고 보면 가깝습니다. 심는 사람은 무슨 열매가 열릴지 모르고, 따는 사람은 대개 다른 분야에서 옵니다. 이 시리즈에서 본 것들이 거의 다 그런 모양이었습니다.

이 일을 하는 사람이 되려면

연구자만 있는 곳이 아닙니다.

  1. 질문을 파는 사람 — 물리, 수학, 화학, 생명 각자의 분야에서 대학원과 박사후 과정을 거칩니다.
  2. 장비를 만드는 사람 — 세상에 없는 것을 재려면 세상에 없는 기계가 필요합니다. 기계와 전자 쪽입니다.
  3. 실험 환경을 지키는 사람 — 지하 실험실의 공기와 물, 극저온 설비, 진동 관리입니다.
  4. 연구를 굴러가게 하는 사람 — 과제 관리, 국제 협력, 안전과 규정입니다. 연구행정이라고 부릅니다.
  5. 알아낸 것을 옮겨 적는 사람 — 논문 편집, 과학 글쓰기, 전시와 해설입니다.

두 번째 줄이 이 분야의 숨은 축입니다. 아무도 잰 적 없는 것을 재려면 파는 기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초과학 연구소에는 기계를 직접 깎고 회로를 직접 짜는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여기서 만든 검출기가 나중에 병원 영상 장비가 되는 일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한 가지는 담담하게 적어 둡니다. 이 길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자리가 넉넉하지 않습니다. 학위를 마친 뒤에도 여러 해를 더 거칩니다. 그것을 알고도 그 질문이 궁금한 사람에게 맞는 길입니다.

시리즈를 닫으며

이걸 배워서 어디다 쓰나. 이 질문으로 시작해 열일곱 편을 지나왔습니다.

핵융합과 가속기와 로켓과 슈퍼컴퓨터를 지나 마지막에 도착한 곳은 쓸모를 묻지 않는 자리였습니다. 이상한 결말 같지만 실은 자연스럽습니다. 앞에서 본 쓸모 있는 것들이 거의 다 쓸모를 묻지 않던 자리에서 나왔으니까요.

그러니 저 질문에 대한 답은 아마 이럴 것입니다. 지금 어디에 쓰는지 모르는 것이, 나중에 어디에 쓸지 정하는 사람에게 재료가 됩니다. 그 재료를 만들어 두는 일을 누군가는 해야 합니다.

남은 질문열매를 내가 못 볼 수도 있는 씨앗을 — 우리는 왜 심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