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K ATLAS· 과학 아틀라스

개념 풀이

원자에는 기억이 없다 — 이순신의 숨은 지금 내 숨에 몇 개나 있나

이순신 장군이 평생 내쉰 숨의 분자가 지금 내 숨 한 번에 6억에서 7억 개 들어 있습니다. 그 탄소는 나무가 되고 열매가 되고 내 DNA가 됩니다. 그런데 원자에는 누구 것이었는지 적힐 자리가 없습니다. 기억은 원자가 아니라 원자가 놓인 배열에 있습니다.

이 글이 꿰는 질문들 24분 분량갱신 2026-09-27

숨 한 번을 세어 보면

숨 한 번에 들이쉬는 공기는 약 500밀리리터, 우유 한 팩의 반쯤입니다. 그 안에 든 공기 분자는 대략 1 뒤에 0이 스물두 개 붙은 만큼입니다. 사람은 1분에 열다섯 번쯤 숨을 쉬니 1년에 약 800만 번, 쉰세 해를 산 이순신 장군은 평생 4억 번 남짓 숨을 쉬었습니다.

지구 대기 전체의 분자는 1 뒤에 0이 마흔네 개쯤입니다. 400년 넘는 세월 동안 바람이 대기를 골고루 섞었다고 치면, 장군이 내쉰 분자는 대기 전체에 아주 얇게 퍼져 있습니다. 그 비율에 지금 내 숨 한 번의 분자 수를 곱하면 6억에서 7억 개가 나옵니다. 숨 한 번마다요.

이 계산은 오래전부터 과학자들이 즐겨 했습니다. 카이사르가 죽으며 내쉰 마지막 숨이 지금 내 숨에 들어 있다는 이야기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숫자가 이렇게 큰 것은 와 분자가 그만큼 작고 많기 때문입니다. 알갱이 6 뒤에 0이 스물세 개를 한 묶음으로 세는 가 그 크기를 잡는 잣대입니다.

그 탄소가 걸어온 길

숨 속에는 이산화탄소도 조금 들어 있습니다. 내쉰 이산화탄소의 탄소는 나뭇잎에 들어가 나무 몸통이 되고, 열매가 되고, 그 열매를 먹은 사람의 몸이 되고, 그 사람의 세포 속 DNA가 됩니다. 수가 이렇게 크면 장군의 숨을 거친 탄소가 지금 내 몸 어딘가에 있을 가능성은 거의 확실합니다.

그러면 물음이 생깁니다. 그 탄소 원자에는 이순신의 것이었다는 흔적이 남아 있을까요.

원자에는 적힐 자리가 없다

없습니다. 흔적이 지워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적힐 자리가 없습니다. 탄소 원자는 양성자 여섯 개와 중성자 몇 개, 전자 여섯 개로 끝입니다. 원소 도구 판 2에서 본 그대로입니다. 어디에도 저장할 칸이 없는 USB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 같은 종류의 원자는 서로 완전히 똑같습니다. 원자가 내는 빛의 색, 은 소수점 아래 열몇 자리까지 재도 원자마다 같습니다. 원자시계는 이 사실에 기대어 만들어졌습니다. 세계의 모든 세슘 원자가 똑같이 떨리니, 그 떨림을 세면 수천만 년에 1초도 어긋나지 않는 시계가 됩니다. 원자 하나하나에 개성이 있었다면 이런 시계는 불가능했을 겁니다.

여기부터 조금 더

물질은 남고, 흔적은 흩어진다

컵을 떨어뜨려 깨뜨리면 컵은 사라지지만 유리는 한 조각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원자는 그대로 있습니다. 사라진 것은 컵이라는 배열입니다. 이순신의 숨도 같습니다. 원자는 지금도 우리 숨 속에 있지만, 그 원자들이 한 사람의 몸 안에서 어떻게 놓여 있었는지는 흩어졌습니다.

물리학자 대부분은 흩어진 정보도 우주에서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깨진 조각의 모양, 퍼져 나간 열, 흔들린 공기 속에 아주 잘게 흩어져 남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걸 다시 모아 컵을 되살리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흩어지기는 쉽고 모으기는 어렵다는 이 한쪽 방향이 가 말하는 것입니다.

원자 하나는 백지, 원자 한 무더기는 달력

원자 하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원자 한 무더기는 시간을 기억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몸속 탄소에는 조금 무거운 탄소, 탄소-14가 일정한 비율로 섞여 있습니다. 죽으면 새로 들어오지 않고, 들어 있던 것은 5730년마다 절반씩 줄어듭니다. 이 덕분에 뼈나 나무 한 조각에 남은 비율만 재면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원자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원자의 비율이 기록을 품는 셈입니다.

의미도 그렇습니다. 벽돌에는 뜻이 없지만 벽돌로 지은 집에는 뜻이 있습니다. 탄소 원자에는 이순신이 없지만, 탄소로 지어진 한 사람의 몸과 그가 남긴 일기에는 있습니다. 기억은 원자에 있지 않고 원자가 놓인 방식, 배열에 있습니다.

도구 원자에서 주기율표까지 — 쌀 한 톨에서 118개의 표로 원자를 축구장만 하게 키워 쌀 한 톨짜리 원자핵까지 들어가 보고, 양성자·중성자·전자를 하나씩 바꿔 수소가 중수소가 되고 헬륨이 되는 것을 보고, 원소마다 손이 몇 개인지로 물과 소금이 왜 그렇게 생겼는지 봅니다. 그다음 한 줄을 접어 표를 만들고 노래로 118개를 훑습니다.
남은 질문기억이 원자가 아니라 배열에 있다면,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배열을 다시 짓는 일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