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역학 — 지금을 알아도 다음이 하나로 정해지지 않는다

같은 조건으로 쐈는데, 매번 다른 자리에 닿습니다

물리에는 큰 줄기가 둘 있습니다. 흔히 뉴턴과 보어처럼 사람 이름으로 가르지만, 그러면 곧 걸립니다 — 아인슈타인은 양쪽에 걸쳐 있습니다. 광전효과로 양자의 문을 연 사람이 바로 그인데, 평생 그 결론에 반대했습니다. 갈림은 사람이 아니라 질문에 있습니다.

고전역학 지금을 알면
다음이 하나로 정해진다
공을 같은 각도 같은 힘으로 던지면 언제나 같은 자리에 떨어집니다. 상대성이론도 이쪽입니다 — 시공간이 휘어도 미래는 여전히 하나입니다. 고전역학 실험판에서 밀어 보기 →
양자역학 지금을 알아도
확률만 나온다
똑같이 쏜 알갱이가 매번 다른 자리에 닿습니다. 장비가 허술해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매번 다름」이 쌓이면 소수점 아래까지 정확한 무늬가 됩니다.

첫 번째 손잡이 — 한 알씩

낱개로 쐈는데 무늬가 생깁니다

가운데 벽에 틈이 둘 있습니다. 왼쪽에서 알갱이를 한 알씩 쏘아 오른쪽 화면에 닿는 자리를 찍습니다. 한 알이 어디에 닿을지는 아무도 미리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많이 쏴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 알씩 쐈는데 줄무늬가 생겼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알갱이 하나가 두 틈을 다 지났다는 뜻이니까요. 그런데 「어느 쪽으로 갔나」를 켜면 무늬가 사라지고 덩어리 둘만 남습니다. 어느 길로 갔는지 알아낼 수 있게 되는 순간, 두 길이 겹치는 일이 없어집니다.

여기서 가장 많이 새는 오해 하나. 「사람이 봐서 그렇다」, 「의식이 영향을 준다」는 설명이 널리 퍼져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보느냐가 아니라 어느 길로 갔다는 정보가 세상에 남는가입니다. 사람이 그 기록을 읽지 않아도, 아무도 없는 방에서도 무늬는 똑같이 사라집니다. 그 정보가 왜 무늬를 지우는지 — 그 해석은 지금도 논쟁 중입니다.

두 번째 손잡이 — 상자

그 확률은 무엇에 대한 확률인가

상자 안에 장치가 있고, 한 시간 안에 절반의 확률로 작동합니다. 열기 전까지 우리는 결과를 모릅니다. 그런데 모르는 것과 정해지지 않은 것은 같은 말일까요? 이 물음을 날카롭게 만들려고 슈뢰딩거가 지어낸 것이 고양이 이야기입니다 — 그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자고 든 예가 아니라, 터무니없다고 든 예로 꺼냈습니다.

여러 번 열어 보면 반반에 가까워집니다. 여기까지는 동전과 똑같습니다. 갈리는 지점은 이것입니다 — 동전은 손바닥 아래에서 이미 정해져 있고,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양자의 경우에는 그렇게 볼 수 없다는 것이 이중슬릿이 보여준 바입니다. 이미 정해진 채로 한 길만 갔다면, 무늬가 생길 수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이 이야기의 핵심은 고양이가 아닙니다. 「모르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슈뢰딩거 자신은 이 결론이 틀렸다는 뜻으로 고양이를 꺼냈는데, 지금은 양자역학을 설명하는 대표 그림이 되어 있습니다. 반론으로 만든 예가 교과서가 된 셈입니다.

이 도구는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안 보여주나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 맞습니다. 이 결과를 만든 사람들 자신이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아무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에 가깝습니다.

고전역학 실험판에서는 손잡이를 같은 자리에 두면 결과도 같았습니다. 여기서는 같은 자리에 두어도 매번 다릅니다. 그런데 그 다름이 쌓이면 정확한 무늬가 됩니다. 하나하나는 알 수 없는데 전체는 정확한 것 — 세상이 이렇게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백 년 전에야 알았습니다.

이 도구에 나온 말들

여기서 만진 장면들에 붙은 이름입니다. 자료실에는 이 이야기를 순서대로 엮은 다섯 편짜리 시리즈가 있습니다 — 에너지가 왜 끊기는지부터 얽힘까지.

물리 자료실 — 양자역학 시리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