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 풀이
중이온가속기 — 세상에 없는 원자핵을 만든다
대전 북쪽 신동지구 땅 밑에 축구장 열한 개 넓이의 건물이 있습니다. 가장 긴 곳이 550미터입니다. 그 안에서 원자핵을 빛에 가까운 속도로 던져 다른 원자핵에 맞힙니다. 무엇을 보려고 이러는 걸까요. 그리고 왜 하필 이 장치는 영하 269도까지 차가워야 할까요.
보는 게 아니라 부딪혀 보는 것
은 너무 작아서 아무리 좋은 현미경으로도 보이지 않습니다. 빛의 물결보다 훨씬 작아서 빛을 비춰도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그래서 남은 방법은 하나였습니다. 무언가를 던져서 어떻게 튀는지 보는 것.
백 년쯤 전에 이 방법으로 원자 속이 거의 텅 비어 있고 가운데에만 아주 단단한 것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얇은 금박에 알갱이를 쏘았더니 대부분 그냥 통과했는데, 아주 가끔 뒤로 튕겨 나왔거든요.
가속기는 이 방법을 훨씬 크고 훨씬 세게 만든 기계입니다. 더 세게 던질수록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미는가
원자에서 전자를 몇 개 떼어 내면 플러스 전기를 띤 알맹이가 됩니다. 전기를 띠고 있으면 전기의 힘으로 밀 수 있습니다. 한 번 밀고, 조금 뒤에 또 밀고, 다시 또 밉니다. 그네를 탈 때 박자를 맞춰 밀어 주면 점점 높이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밀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곧게 날아가는 알갱이를 원하는 길로 휘게 하고, 흩어지지 않게 다발로 모아 주어야 합니다. 그 일은 자석이 합니다. 그래서 가속기는 미는 장치와 휘는 자석이 길게 줄지어 선 모양입니다.
1억 도 옆에 영하 269도
자석은 아주 세야 합니다. 보통 전선으로는 그만한 자석을 만들 수 없습니다. 전기가 흐르면 전선이 뜨거워지고, 세게 흘릴수록 더 뜨거워져 결국 견디지 못하니까요.
그런데 어떤 물질은 아주 차갑게 만들면 전기가 흐를 때 저항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뜨거워지지 않으니 얼마든지 세게 흘릴 수 있습니다. 이것을 라고 합니다. 대신 대가가 있습니다. 그 상태를 만들려면 영하 269도쯤까지 내려야 합니다.
앞 편에서 본 핵융합 장치는 1억 도를 만드느라 애를 씁니다. 이 장치는 반대로 영하 269도를 만드느라 애를 씁니다. 우주에서 가장 뜨거운 것과 가장 차가운 것이 대전 안에 같이 있는 셈입니다.
부딪히면 무엇이 생기나
원자핵끼리 세게 부딪히면 부서지면서 여러 조각이 튀어나옵니다. 그 조각 중에 우리가 찾는 것이 있습니다. 희귀 입니다.
동위원소는 같은 인데 무게가 다른 것을 말합니다. 원자핵 안에는 양성자와 가 들어 있는데, 양성자 수가 같으면 화학적으로는 같은 원소입니다. 중성자 수만 다르면 이름은 같고 몸무게만 다른 형제인 셈입니다.
희귀동위원소는 그중에서도 자연에 아예 없거나, 만들어져도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리는 것들입니다. 라온이 하려는 일이 바로 그것을 잠깐 만들어 놓고 사라지기 전에 재는 것입니다.
여기부터 조금 더
없는 것을 왜 만드나
금은 어디서 왔을까요. 지구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별이 만들었습니다. 무거운 원소는 별 속에서, 그리고 별이 부서지는 순간에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는 중간 단계가 있습니다. 가벼운 원자핵이 중성자를 계속 받아먹으면서 무거워지는데, 그 중간에 거쳐 가는 것들이 대부분 자연에 남아 있지 않은 희귀동위원소입니다. 잠깐 있다가 다른 것으로 바뀌어 버리니까요.
그러니까 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려면 그 중간 단계의 성질을 알아야 하는데, 우주에서는 그 순간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땅에서 잠깐 만들어 놓고 봅니다. 가속기가 하는 일이 결국 별 속의 한순간을 여기서 재현하는 것입니다.
라온이 다른 점
희귀동위원소를 만드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가벼운 이온을 가속해서 무거운 표적에 때리는 방법, 그리고 반대로 무거운 이온을 가속해서 가벼운 표적에 때리는 방법입니다. 앞의 것은 만들어진 동위원소를 다시 골라내기 좋고, 뒤의 것은 아주 짧게 사는 것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세계의 가속기들은 대개 둘 중 하나만 씁니다. 라온은 둘을 이어 붙이려고 만들어졌습니다. 먼저 한 방법으로 희귀동위원소를 만든 다음, 그것을 다시 가속해서 또 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한 가지 방법만 쓸 때보다 더 희귀한 것에 닿을 수 있습니다. 이 결합을 시도한 것은 라온이 처음입니다.
만약 아무도 본 적 없는 새 원소를 여기서 찾아내면 이름을 코리아늄으로 붙이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소 이름은 처음 만든 곳이 붙이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하게, 아직 절반이다
이 사업은 십 년 넘게 걸렸고 여러 차례 미뤄졌습니다. 지금은 저에너지 구간이 완성되어 빔이 나오고, 국내 대학과 연구기관이 핵물리와 천체물리 실험에 쓰기 시작한 단계입니다. 고에너지 구간은 아직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라온은 완성된 시설이 아니라 반쯤 지어진 채로 이미 일을 시작한 시설입니다. 큰 과학시설이 대개 이렇습니다. 다 짓고 나서 쓰는 게 아니라, 되는 데까지 쓰면서 나머지를 짓습니다.
이 일을 하는 사람이 되려면
가속기 한 대에 필요한 공부는 핵물리 하나가 아닙니다.
- 무엇을 때려서 무엇을 볼지 정하는 사람 — 핵물리와 천체물리 쪽입니다.
- 알갱이를 어떻게 밀고 어떻게 다발로 모을지 설계하는 사람 — 가속기물리 쪽입니다.
- 영하 269도를 만들고 유지하는 사람 — 저온공학과 초전도 쪽입니다.
- 550미터를 진공으로 비우고 그 구조를 버티게 하는 사람 — 기계와 진공공학 쪽입니다.
- 튀어나온 조각을 잡아내고 그 엄청난 자료를 걸러 내는 사람 — 검출기와 전산 쪽입니다.
큰 과학시설의 좋은 점이 여기 있습니다. 물리를 잘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차갑게 만드는 일, 비우는 일, 자료를 다루는 일이 다 필요하고, 그 일들도 똑같이 어렵습니다.
라온은 기초과학연구원의 중이온가속기연구소가 운영합니다. 대덕연구단지가 아니라 그 북쪽 신동지구에 있습니다. 지도에서 대전을 열면 다른 점들과 떨어져 위쪽에 혼자 찍혀 있는 것이 이 자리입니다.
남은 질문자연에 없는 것을 잠깐 만들어 보고 나서야 자연을 이해할 수 있다면 — 우리가 아는 자연은 어디까지가 있는 것이고 어디부터가 만들어 본 것일까요?